“홈런을 치면, 대전구장은 흔들렸다.”

1980~90년대, 한국 프로야구에서 장타와 파워를 이야기할 때
장종훈의 이름을 빼놓을 수는 없다.
그는 한화 이글스(빙그레 시절 포함)의 프랜차이즈 타자이자,
KBO 리그 통산 최다 홈런(당시 기준) 기록 보유자였고,
그의 35번 유니폼은 구단의 자존심이자, 팬들의 영원한 상징이었다.
⚾ 빙그레의 젊은 거포 탄생
1988년, 장종훈은 빙그레 이글스 유니폼을 입었다.
입단 당시 포지션은 유격수였다.
하지만 장종훈은 체격, 스윙 메커니즘, 장타력에서
이미 평범한 내야수가 아니었다.
초반 몇 년은 수비와 공격에서 기복이 있었지만,
그의 파워는 이미 리그 최고 수준으로 주목받았다.
그리고 1990년대 초반,
그는 마침내 홈런왕의 길로 들어선다.
🏆 1991년 – 첫 전성기의 시작

1991년 장종훈은 타율 .283, 35홈런, 88타점을 기록하며
KBO 홈런왕에 올랐다.
이는 빙그레 구단 역사상 첫 홈런왕이었고,
당시만 해도 35홈런은 리그에서도 매우 희귀한 대기록이었다.
그는 무지막지한 힘과
빠른 손목 스냅,
그리고 몸 중심을 절대 무너뜨리지 않는 스윙으로
투수들을 압도했다.
🔥 1992년 – 홈런의 황제
1992년은 장종훈의 이름을 KBO 역사에 새긴 해였다.
그는 타율 .299, 41홈런, 104타점을 기록하며
다시 한 번 홈런왕에 올랐다.
41홈런은 당대 KBO 단일 시즌 최다 기록 중 하나였으며,
이 기록은 이후 한동안 깨지지 않았다.
그해 그는 MVP를 수상했고,
“대전의 하늘엔 장종훈의 홈런포가 떠 있다”는 말이 유행했다.
🧱 ‘장타머신’에서 ‘타격기계’로
1990년대 중후반으로 가면서,
장종훈은 단순한 홈런 타자에서
리그 정상급 타격 기술을 갖춘 완성형 타자로 변신했다.
1996년: 타율 .311, 23홈런, 83타점
1997년: 타율 .315, 28홈런, 97타점
특히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그의 존재감은 절대적이었다.
결정적인 홈런과 클러치 타격으로
한화 이글스 창단 첫 우승을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다.
💪 부상과 싸우며 이어간 통산 홈런 기록
2000년대 초반, 잦은 부상과 나이로 인한 기량 저하가 있었지만,
장종훈은 꾸준히 홈런을 추가했다.
2005년, 그는 통산 340홈런을 달성하며
KBO 리그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2012년 이승엽이 경신)
그의 홈런 하나하나는 대전구장의 상징이었고,
팬들에게는 “장종훈이 한 방 치면 오늘 경기는 끝났다”는 믿음을 주었다.
🏟 2005년 은퇴 – 그리고 영구결번 35번

2005년 9월 23일, 장종훈은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마지막 타석, 팬들은 모두 기립하여
한 시대를 빛낸 거포를 향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2006년, 한화 이글스는 그의 등번호 35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송진우의 21번과 함께,
대전구장에 걸린 두 번째 영구결번이었다.
📊 장종훈 통산 성적 (1988~2005)
- 경기: 1,909경기
- 타율: .281
- 안타: 1,909
- 홈런: 340
- 타점: 1,145
- 장타율: .513
- 출루율: .363
이 성적은 그가 단순히 ‘홈런 타자’가 아닌
팀 중심 타자이자 장타와 타점 생산에서 독보적인 선수였음을 보여준다.
🎤 은퇴 이후
장종훈은 은퇴 후 한화에서 코치, 수석코치를 지냈고,
현재까지도 야구계에서 다양한 역할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지도 철학은 단순하다.
“야구는 결국 기본기다. 기본이 무너지면 홈런도 없다.”
🧱 결론 – 35번은 영원하다
장종훈은 한화 팬들에게 단순한 선수 이상의 존재였다.
그는 팀의 첫 홈런왕, 첫 MVP, 첫 우승 멤버였고,
대전야구장의 심장 같은 타자였다.
그가 쏘아 올린 홈런은 숫자로 남았지만,
그 순간의 함성, 관중석의 떨림, 팬들의 심장은
지금도 여전히 35번을 기억한다.
“홈런 치는 장종훈, 그때 우리는 행복했다.”